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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2009.06.20 생의 절반 1
  2. 2008.12.28 #025 511 W22ND STREET, NEW YORK
  3. 2008.12.22 #018 사랑해라

생의 절반

2009. 6. 20. 22:53 round 1


생의 절반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- 이병률



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년이 걸린다 치면
한 사람이 사는데 육십년이 걸린다 치면
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


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
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
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
한 며칠 꽃방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
앞으로 한 삼십 년쯤
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
꼬박 삼십년이 걸린셈


이러저러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
남은 삼십년 그 세월동안
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
싹을 틔우지도 꽃방울을 맺지도 못하고
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


한 사람을 만나는데 삼십년이 걸린다 치면
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년이 걸린다 치면
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


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
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




+ 얼마 전, 친구에게 선물로 줄 시집을 고를 때 읽게 된 이병률의 시. 
  시집 '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' 中


:

차마 이별하기에 그 길엔 사람이 너무 많았던가.
그 길은 너무 밝지 않았던가.
비 온 뒤라 길이 질척이지는 않았던가.
어려운 길이었던가.
잊지 못할 길이었는가.
내가 먼저 발걸음을 뗀 길이었는가.
당신이 그 길 위에 서서 오래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던 길이었던가.
코끝으로 작약꽃 향이 아스라이 스치고 지나갔던가.
아니 그냥 향수였던가.
아니면 나무 타는 냄새였던가.
정녕 안녕이라고 말한 길이었던가.
한데 왜 나는 그 길 위에 다시 서서 당신을 부르는 걸까.


- 이병률, '끌림' 중


:

#018 사랑해라

2008. 12. 22. 21:32 round 1
......

동전을 듬뿍 넣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당신 사랑이다.
너무 아끼는 책을 보며 넘기다가,
그만 책장이 찢어져 난감한 상황이 찾아와도 그건 당신의 사랑이다.
누군가 발로 찬 축구공에 맑은 하늘이 쨍 하고 깨져버린다 해도,
새로 산 옷에서 상표를 떼어내다가 옷 한 귀퉁이가 찢어져버린다 해도
그럴 리 없겠지만 사랑으로 인해 다 휩쓸려 잃는다 해도 당신 사랑이다.
내 것이라는데,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데
다 걸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.

무엇 때문에 난 사랑하지 못하는가, 하고 생각하지 마라.
그건 당신이 사랑을 '누구나, 언제나 하는 흔한 것' 가운데 하나라고
믿고 있기 때문이다.
왜 나는, 잘하는 것 하나 없으면서 사랑조차도 못하는가,
하고 자신을 못마땅해하지 마라.
그건 당신이 사랑을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.
사랑은 흔한 것도 의무도 아닌 바로 당신, 자신이다.

사랑해라,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잃어온 것보다
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.
사랑하고 있을 때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며, 아름다운 사람이다.


 - 이병률 산문집 '끌림' 중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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